연결과 조응의 사유, 김순임의 대지의 미학
미술평론가 유현주
깊이 들여다 봄
김순임은 자연을 재료로 창작활동을 해왔다기보다 자연의 내면에 자신을 연결하는 작업을 해온 작가이다. 그가 주로 찾은 곳은 산, 바닷가, 염전, 빨래터, 작은 시내, 다리 아래의 물, 창고, 동네의 버려진 축사와 같이 어디에나 있는 훤한 공간이지만 그리 주목할 만한 것은 없어서 눈에 띄지 않는 장소들이다. 그러나 장소를 들여다보는 작가의 깊은 시선과 늘 자연에 조응하는 그의 감각은 이 공간들을 정체된 장소가 아니라 ‘흐르는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김순임의 ‘흐르는 공간’은 대지를 단순히 ‘땅’으로만 보는 차원과 다르다.
그가 말하는 대지는 그 지역의 기억과 물질이 표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이는 장소다. 지역의 공간과 자연 그리고 그곳의 오랜 거주자들은 시간에 연결되어 닮아간다고 작가는 말한다, 자연과 인간은 그 장소에서 서로 닮아가는 ‘공동의 거주민’이라는 김순임의 생각은, 자연 행위자와 인간 행위자가 서로 연결되어 공통의 세계를 구성해왔다고 보는 브뤼노 라투르의 사유와도 공명한다.
라투르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에서 바라보면, 대지의 역사는 인간만이 주체인 역사가 아니며 이 행성을 이루는 자연 및 비-인간 행위자들과 함께 만들어온 역사다. 지구라는 행성도 NASA가 토성에서 촬영한 파란색 구(球)로만 이해하는 것은 단편적일 수 있다. 지구 행성을 존재하게 해주는 긴밀한 연결 고리들을 간과하고 지구의 외적 이미지만을 찬양하는 대신, “더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느리게, 그리고 마음을 다해 들여다보면” 이 행성 안에 ‘흐르는 것’을 잘 볼 수 있고, 잘 보게 해줄 수 있다고 작가는 믿는다.
생명을 잇기
지구를 연결망으로 보면서, 지질학자들만이 아니라 인문학자들도 지구의 임계영역(critical zone)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즉 ‘암석, 토양, 물, 공기, 생물과 관련된 복잡한 상호작용이 자연적인 서식지를 조절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원의 가용성을 결정하는 이질적인 지표면 근처의 환경’을 둘러싼 인간과 자연의 ‘대칭적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는 근대의 이성 중심주의 사고가 줄곧 인간의 자연지배를 정당화하거나 자연을 인간과 분리된 ‘객체’로 보게 하는 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다.
세계의 지진계인 예술은 이러한 현상에 빠르게 반응했다. 20세기 들어 자본주의가 정점을 향해 치달아 가면서, 자연을 단지 자본을 증식하기 위한 ‘자원’이나 ‘저장고’쯤으로 보는 시각에 반기를 든 예술이 자연과 인간 사이에 개입하여 기존의 미술에서 사용하지 않은 언어들을 직조해냈다. 그러한 맥락에서 대지미술, 어스아트, 자연미술, 생태미술 등 다양한 예술 언어들이 생겨났고, 표현방식은 각각 다르지만 공통된 인식을 갖는다. 바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김순임이 어떤 예술의 언어를 택하든, 그의 작업은 자연과 인간을 구분하거나 어느 한쪽을 우위에 두지 않은 채 양쪽 모두를 ‘흐르는 생명’으로 보는 생태적 관점이 두드러진다. <흐르는 이들의 숲>(2018)과 <흐르는 이들의 공간>(2019)은 작가의 그러한 의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하나가 대만의 타이페이 관두미술관으로 가는 길에 주운 ‘어젯밤에 떨어진 나뭇잎들’의 전시라면, 다른 하나는 영도의 창고가 공장에서 문화공간으로 변신 중일 때 ‘길 위에 떨어진 잎들’을 주워 그곳에서 전시한 작업이다.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을 쓰레기통에 버려질 죽은 ‘사물’로 보는 대신, 다른 곳으로 ‘이동’ 중이라는 작가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는 철사에 꿰매어져 예술작품으로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나뭇잎들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흐르는 이들’이라고 보는 작가의 관점은 생기적 유물론에 가깝다. 사물과 사람은 ‘자연의 양태’라고 정의한 스피노자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생기적 유물론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사물은 우연과 변화에 종속된 생기적 존재다.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돌 작업에서도 나뭇잎 작업과 마찬가지로 자연물의 큰 변형 없이 예술적 개입을 통해 사물에 깃든 생명이 환기된다. <물 때를 기다리며>(2018)에서 머리에 커다란 돌을 이고 있는 해녀의 퍼포먼스는 작가가 돌과 인간을 ‘하나의 존재’로 잇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작업은 자연과 인간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서로 연결된 생명이라는 전체론적(holistic) 생태 사유의 이미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팔복예술공장에 설치한 플라스틱들도 흐르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썩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이 물질은 작가의 말대로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기도 하고, 물 위를 이리저리 흐르기도 하고, 작은 생물들의 집이 되어주기도 하고, 먹이가 되기도 하며, 풍경을” 이룬다. 한마디로 그에게 플라스틱은 또 다른 ‘자연’이다. 2020년 후쿠오카의 큐슈예문관에서의 전시 <바다 무지개>와 부산 다대포에서 전시한 <바다풍경_다대포>의 작업을 통해 작가는 수많은 플라스틱이 동아시아의 해류를 타고 이동하는 인공의 자연임을 인정했다.
김순임의 이러한 플라스틱 작업은, 영국의 던스턴 석탄 하역장의 돌제부두에 설치된 볼프강 바일더(Wolfgang Weilder)의 건축적 구조물 <원뿔Cone>(2014)에 대한 인류학자 팀 잉골드의 단상을 소환한다. 미세플라스틱이 원료인 아쿠아딘(Aquadyne)으로 만든 이 작업에서 잉골드는 ‘어느 미래에 플라스틱 퇴적층이 오히려 아쿠아딘의 공급 원료가 될 수도 있음’을 상상하며,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의 양가적 의미를 묻는다. 플라스틱은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가로막는 불편한 물질이지만, 한편 예술작업으로 재구축되고 리사이클링된 제품으로 재사용된다면, 우리 행성의 “지속적인 생명의 흐름”에 오히려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에 플라스틱을 문화재 유물처럼 전시한 <변산, 풍경이 된 플라스틱>(2024)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플라스틱이 사람의 몸 크기만큼 거대하게 확대된 사진 현수막으로, 인류세를 위협하는 이 인공의 생명체들이 유물로 남을 풍경의 하나가 되길 바라는 예술의 행위로서.
대지와 조응하기
김순임은 대지에 달을 그린다. 그가 달을 만드는 방식은 바닥을 살펴보고 “숨겨지고 감춰진 빛 찾아내기”다. 그가 찾는 달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 벽, 돌, 물, 강 등 우리를 받쳐주는 대지에 있다. 2017년 독일과 프랑스에서 작가는 <바위에 뜬 달>과 <빨래터에 뜬 달>을 그렸다. 독일의 다름슈타트(Darmstadt)에서는 바위의 몸체에서 나온 돌 조각으로 바위에 달을 새긴 작업을, 프랑스의 라봐르(Lavoir)에서는 가장 오래된 빨래터 바닥을 ‘닦아’ 하얗게 빛을 드러낸 작업이다. 라봐르는 여성들이 가족을 위해 빨래하던 곳이며 에밀 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의 주인공이 세탁부가 되어 생계를 위해 빨래하던 배경이기도 한 장소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가장 낮은 곳에서 살다 간 여성들의 삶에 대한 기억을, 라봐르를 덮은 초록의 이끼 아래 숨겨져 있던 ‘달’로 김순임이 찾아냈다.
작가는 대지에 그린 선으로 쉼 없이 ‘흐르는 공간’을 만든다. 전주천에서 그는 일 년 동안 천의 가운데, 물길에 생긴 보에 의해 삼각형으로 생겨난 돌들이 쌓인 구간에서, 달과 달무리의 형상을 상상하며 둥글게 연결한 돌멩이로 겹겹의 선을 그려 원형의 달을 완성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곳은 풀이 자라고 새들과 작은 동물들과 사람들의 산책로가 되어 선들은 지워졌지만, 전주라는 도시 생태를 거울처럼 반영한 김순임의 달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된 지구의 운명공동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또한 달을 그리며 보낸 작가의 시간은 전주의 물과 바람 그리고 계절의 변화와 함께 대지와 조응한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